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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서 ] 노혜영 영화시나리오 작가 인터뷰 Hit. 7736 2009-11-11

영화시나리오, 즉 영화 촬영의 밑그림이 되는 대본을 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보통 한 줄짜리 아이디어로 시작한 아이템이 2시간짜리 영화가 되기까지, 수개월 혹은 수년간 시나리오를 다듬고 개발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시나리오는 영화의 기초설계도와 같기 때문에 완성된 영화의 성패는 시나리오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울러 시나리오 단계에서 투자, 캐스팅 등 영화의 모든 준비가 시작되므로, 영화제작기간 중 가장 많은 노력과 시간을 요하는 작업단계이기도 합니다.
영상적인 상상력과 그걸 정확하게 표현해내는 문학적 소양이 필요합니다.
또 배우가 매번 다른 인물을 연기하듯, 시나리오작가도 작품을 쓸 때마다 매번 다른 캐릭터와 세계를 그려내야 하므로, 상식과 인문적 소양이 많을수록 유리하죠. 하지만 잘 모르는 분야를 써야 한다 하더라도 인터뷰와 취재를 통해 배우면서 쓸 수 있습니다.
다양한 영화를 많이 보면서 영상으로 어떻게 표현되는지에 대한 훈련을 하는 것도 좋고, 독서와 체험을 통해 자기만의 총알을 쌓아두는 것도 좋습니다.
주변의 일상과 인물들을 평소에 주의 깊게 관찰하는 시선을 가져보세요. 그보다 중요한 건 자기가 무엇을 쓰고 싶은지, 무엇을 잘 하는지, 자기 자신을 잘 아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영화를 통해 작가가 어떤 세계를 추구하는지는 정말 중요합니다. 장르적으로는 스릴러를 잘 쓰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코미디를 잘 쓰는 작가가 있겠죠.
자기만의 세계와 장점을 계발하세요. 학교나 전공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결국 작가의 능력은 시나리오로 판단되거든요. 많이 쓸수록 실력은 늘고, 많이 써두면, 바로 그것이 훌륭한 경력이자 자산이 됩니다.

<어댑테이션>이란 영화를 보면, 니콜라스 케이지가 <존 말코비치>로 유명한 시나리오작가 ‘찰리 카우프만’을 연기하는데요. 정말 시나리오작가만이 박장대소, 완전 공감할 만한 장면들이 나옵니다. <존 말코비치> 촬영장에 갔다가 그가 아카데미상까지 수상한 작가인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해 촬영장 밖으로 쫓겨나는 장면이나, 타자기 앞에 앉아 갖은 잡념으로 한 줄도 못 쓰면서 흘러나오는 나레이션이 압권입니다. 아카데미상을 탔든, 아직 데뷔를 못 했든, 시나리오작가의 일상과 고민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시나리오작가가 되고 싶다는 후배들을 보면, “내 처지가 이런데...”하며 적극 권할 수 없다는 현역 작가들을 많이 봅니다. 저 역시도 그렇고요. 우리 영화계에서 시나리오작가의 위상이란 헐리우드나 TV에서 보는 것만큼 화려하지 않거든요. 현재 충무로에서 전업작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작가들이 40명도 채 되지 않습니다. 작업은 늘 힘들지만 그에 대한 보수는 본인의 기대에 미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어떤 직업이건 그만큼 고단하지 않겠는가 하고요.

저는 원래 장래희망도 없던 그저 책읽기를 좋아하는 시골아이였습니다. 고3 때 진학지도서에 실린 문예창작과 선배의 인터뷰를 보고, 나도 즉흥적으로 ‘구성작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들어간 대학에서 문학과 연극을 접하며 극작가란 꿈을 키웠고, 신춘문예에 도전할 만큼 욕심도 키웠죠. 졸업 후 이런 저런 현실이 버겁기도 했지만, 점점 욕심을 내어 꿈을 키운 게 어느덧 시나리오작가까지 왔습니다. 스크린을 내 글로 채운다는 것을 한 번도 상상하지도 않았었는데 말이죠. 중요한 건, 아는 만큼 보는 만큼 꿈도 키울 수 있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난 안 돼’란 생각은 하지 마세요. 좌절하더라도 포기하지 마세요. 오픈마인드로 뭐든 긍정적으로 경험하세요. 꿈의 크기는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는 거랍니다.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했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졸업 후에도 계속 글 쓰는 일을 하게 되었어요.
카피라이터, 연극, 드라마투르그(극작 고문), 시트콤 보조작가 등 전방위적으로 뛰어다니다가, 우연한 기회에 후배가 연출부로 있던 영화의 시나리오를 모니터링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개발 중이던 <싱글즈>라는 시나리오의 초고였는데, 모니터링을 하면서 평범한 20대 여성의 살아있는 모습을 잘 포착해냈는지 제작사로부터 직접 시나리오를 집필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싱글즈> 이후에는 <영어완전정복>, <미녀는 괴로워>, 그리고 최근 촬영을 시작한 <걸프렌즈> 등으로 제 필모그래피를 채우고 있습니다. 많은 시나리오를 써왔지만, 주로 영화화된 작품은 이 시대 젊은 여성들의 이야기이네요. 잘 아는 것을 제일 잘 쓴다는 말이 진리인가 봅니다.
가장 힘들 때는 시나리오가 잘 풀리지 않을 때, 잘 써지지 않는데 마감기한이 이미 지나갔을 때, 그만두고 싶은데 이미 계약금을 받아서 다 써버렸을 때죠.(웃음)
시나리오 단계에서 작가와 함께 한 배에 타는 주요 인물들이 있습니다. 제작자(피디), 감독과 함께 방향을 공유하며 시나리오를 써야 하는데, 서로의 생각이 달라 일치된 방향으로 흘러가지 못할 때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힘이 듭니다. 스스로에게 확신을 가지고 자신 있게 추진할 때 가장 좋은 결과물이 나오는데, 자신감이 떨어질 땐 정말 힘들어요.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누가 뭐래도 내가 쓴 글이 제일 훌륭하다고 생각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에게 냉정해져서 웬만해서는 만족스럽지가 않습니다. 시나리오를 쓰다가 나도 모르게 슬픈 장면에서 눈물이 날 때나, 웃긴 장면에서 웃음이 튀어나올 때가 있는데, 종종 경험하는 일은 아니지만 그럴 땐 이 일이 참 미치도록 좋습니다. 스스로 감화되지 못하면 남을 감동시키거나 설득할 수 없으니까요.
365일 마감에 시달리면서 괴롭다, 괴롭다 하지만, 기분 좋은 순간은 분명히 있죠. 가령, 영화가 개봉되고 재밌게 보았다는 인사를 들을 때. 그런데 그보다 짜릿한 건, 처음으로 가편집본을 보았을 때의 쾌감! 시나리오의 활자가 눈앞에서 영상으로 살아나온 거죠.
특히 마음에 쏙 들게 나왔을 땐, 아, 그땐 정말! 감독, 배우, 스태프들 수백 명에게 뽀뽀라도 해주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