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는 가톨릭대학교 미디어기술콘텐츠학과에서 문화콘텐츠의 스토리텔링을 연구하고 있는 교수 이동은입니다.
최근 우리들은 게임이 하나의 미디어에 머무르지 않고 영화, 책, 모바일 등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이야기를 확장하는 현상을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이 현상이 바로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인데요. 이번 시간에는 블리자드 사의 <워크래프트> 사례를 통해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의 전략을 자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게임이 어떻게 미디어를 활용하면서 스토리 세계를 확장하고 있는지, 그리고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이 게임 IP에 끼치는 영향이 무엇인지 이번 시간을 통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게임은 본질적으로 다양한 미디어와 융합하는 성질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뉴미디어인 게임은 책이 가지고 있는 스토리와 영화가 가지고 있는 영상 미학을 차용, 개조, 변형하면서 탄생하였습니다. 따라서 게임을 통해 우리는 소설에서 엿볼 수 있었던 매력적인 주인공과 흥미로운 사건들을 만날 수 있고,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시각적인 즐거움과 아름다운 음악도 향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게임은 그 태생적 특징에서 미루어 짐작하듯 게임 이외의 다른 미디어와의 융합을 유연하게 만들어낼 수 있는 특징을 내재하고 있습니다.
온라인 게임의 시초라 불리우는 넥슨의 <바람의 나라>가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개발되었고, 비록 흥행에는 실패하였으나 게임 <반지의 제왕> 역시 동명의 소설이 원작으로 한 사례를 보면 게임의 미디어 융합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현상인지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툼레이더>, <사일런트 힐>, <레지던트 이블>처럼 게임 원작 영화가 만들어지거나 <이코>, <헤일로>, <디아블로>, <스타크래프트> 등 게임 원작 소설이 쓰여진 사례들에서도 게임의 미디어 융합 현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사실 앞서 언급한 사례들은 오늘날 주목하고 있는 트랜스미디어 콘텐츠로서로 설명하기엔 적합하지 않습니다.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은 이미 ‘성공한 원작에 대한 반복’이 아니라 미디어를 통해 스토리와 세계관을 확장한다는 개념으로 기존 미디어에서 부족했던 스토리를 다른 미디어의 경험으로 채워나가는 전략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임 <사일런트 힐>의 영화화 사례를 예로 들어 설명해보겠습니다. 게임 <사일런트 힐>은 여행 중 갑자기 사리진 딸을 찾아 낯선 도시를 방문하게 된 아빠 해리의 이야기입니다.
음산한 마을에서 알 수 없는 몬스터들과 대결을 펼치고 스테이지를 하나씩 클리어할 때마다 딸 셰릴을 둘러싸고 있는 사일런트 힐의 수수께끼가 하나씩 풀어지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수수께끼 형식의 내러티브를 영화 <사일런트 힐>의 제작진은 주목합니다. 원인을 모를 사건이 벌어지고 사건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단서를 조합하는 주인공의 행위는 영화의 미스터리 장르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포르자’, 즉 몸의 플롯을 활용한 구조와 잘 어울립니다. 때문에 영화 제작진들은 이 매력적인 스토리 구조를 활용하여 긴장감 있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어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문제는 게임에서 영화로 미디어 전환하는데 있어 주인공의 성별을 남에서 여로 바꾸는 것 이외에 다른 스토리텔링 변화를 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야기를 확장하는 식의 트랜스미디어 콘텐츠라고 보기보다는 원작 게임의 성공에 힘입어 경제적 이윤을 추구하고 거점 콘텐츠의 미디어의 영역을 넓히고자 한 OSMU식 미디어 전환 전략을 펼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 게임 <워크래프트>의 미디어 융합 전략은 OSMU와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이른바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의 특징들이 보이는 것인데요.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 제창자인 헨리 젠킨스는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이 성립하려면 다음 네 가지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첫째, 다양한 미디어 플랫폼을 통해 공개되어야 하고, 둘째 각각의 새로운 텍스트가 전체 스토리에 분명하고도 가치 있는 기여를 해야 합니다. 셋째, 각각의 미디어는 자기 충족적이어야 합니다. 즉 영화를 보지 않고도 게임을 즐길 수 있어야 하며, 그 역도 성립해야 합니다. 넷째, 어떤 상품이든지 전체 프랜차이즈로의 입구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워크래프트>는 위의 조건들을 모두 충족한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이에 아직도 끝나지 않은 <워크래프트>의 스토리와 세계관이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어떻게 분배되고 확장되고 있는지 살펴봄으로써 <워크래프트>의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 전략을 도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첫 번째가 비동기식 미디어 확산 전략입니다. 1994년 첫 선을 보인 <워크래프트>는 2016년 개봉한 영화<워크래프트 : 전쟁의 서막>에 이르기까지 20년의 긴 역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워크래프트>는 정전이라고 할 수 있는 실시간 전략 게임 2편과 이후 롤플레잉게임 1편, 소설 20여 편, MMORPG(엠엠오알피지) <월드오브워크래프트> 7개의 확장팩, 카드게임사 <하스스톤>과 영화 <워크래프트 : 전쟁의 서막> 게임 제작사인 블리자드 사의 적극적인 참여로 만들어진 TV애니메이션, 만화와 오디오, 단편 소설,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미디어를 넘나들며 그 스토리와 세계관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20년이라는 시간차를 두고 순차적이면서도 때론 중첩을 이루며 콘텐츠를 공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은 완전한 하나의 세계를 미디어별로 분산시키는 전략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으로 설명하면 미디어마다 전개되는 스토리는 분명 독립적인데 반해 각각의 스토리를 모으면 마치 퍼즐이 맞춰지듯이 하나의 거대한 완전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워크래프트3:프로즌쓰론>과 <월드오브워크래프트:리치왕의 분노>, 그리고 소설 <아서스>의 사례는 모듈화된 스토리 세계의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워크래프트3>에서 플레이어는 제왕 테러나스 메네실 2세의 외아들이자 장차 로데론 왕국을 다스릴 왕자 아서스 메네실의 역할을 롤플레잉하게 됩니다. 아서스 왕자로 분한 플레이어는 오크족의 위협을 잠재우기 위해 전설적인 팔라딘 우서 경과 스트란브라드 마을을 방어하는 임무를 시작합니다. 온순한 왕자였던 그는 북쪽 지방의 역병을 조사하면서 독단적이고 냉혈한으로 변해가고 분노와 복수라는 악마의 힘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그리고 ‘빛’이 아닌 ‘어둠’의 힘으로 백성을 구하고자 하는 자신의 결정에 반대하는 아버지를 살해하기에 이릅니다.
게임 내에서는 아서스의 성품 변화에 대해 상세하게 다루지 않습니다. 사실 게임이라는 미디어가 인물의 감성적인, 혹은 성격적인 변화를 체험하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때문에 소설 <아서스>에서는 게임 스토리에서 채울 수 없는 어린 시절 아서스의 성품에 대해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따뜻하고 아름다운 품성을 가진 온순한 왕자였던 아서스가 워크래프트 세계의 존재감 있는 악역 리치왕이 되기까지의 일들을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점은 소설의 스토리가 워크래프트 전체 세계에 이바지하면서도 독자적인 스토리 세계를 구축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더 흥미로운 사례는 <워크래프트3>와 <월드오브워크래프트:리치왕의 분노>의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 양상에서 나타납니다. <워크래프트3>에서 아서스는 아버지를 살해하면서 ‘왕위를 계승하는 중’임을 언급합니다. 그가 하는 살인은 목숨을 빼앗는 행위가 아니라 아버지의 자리, 아버지가 가진 모든 것을 넘겨받는 일종의 제의적 과정임을 강조하는 것이지요.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크로노스가 아버지 우라노스를 거세하고 우주의 지배자가 된 후 다시 아들 제우스에게 살해당하고 제우스에게 주도권을 이양하는 서사 패턴인 ‘부친살해’ 모티프는 <워크래프트>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워크래프트3>에서 플레이어가 아서스의 역할을 맡아 게임플레이를 했다면 <월드오브워크래프트>의 두 번째 확장팩인 <리치왕의 분노>에서 플레이어는 스컬지 군대를 이끌고 다시 세상에 나타난 리치왕을 물리쳐야하는 임무를 부여받습니다.
<워크래프트3>에서 ‘아버지’ 테러너스 국왕을 죽이는 ‘아들’ 아서스의 역할을 플레이어가 수행했다면, <리치왕의 분노>에서는 ‘아버지’ 아서스를 죽이는 새로운 ‘아들’의 역할을 다시 수행하게 된 것입니다. 워크래프트>의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의 세 번째 전략은 바로 전방위적으로 확장되는 나선형의 스토리텔링 구조입니다. 우선 전방위적으로 확장된다는 말의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워크래프트>는 스토리를 확장하는데 있어 게임을 그 중심축으로 삼고 있습니다. 아제로스와 드레노어의 평행 세계로 존재하던 두 개의 행성이 어둠의 계략으로 ‘어둠의 차원 문’이 열리면서 인간과 오크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RTS 2편과 RPG 1편, 그리고 10년 후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MMORPG의 7개 확장팩은 인간과 오크의 전쟁을 시작으로 시간의 흐름을 따라 스토리를 확장해나가는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시간을 축으로 연대기적 시간을 확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제로스는 동부왕국과 칼림도어에서 노스랜드로, 그리고 판다리아로 확장되는 식의 공간 확장과 나이트 앨프와 언데드, 판다렌 등의 새로운 종족과 직업 등을 추가하면서 스토리를 확장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방식이 전방위적 확장이라고 한다면 나선형의 확장은 다중의 미디어가 같은 시간대의 같은 사건을 반복하고 있지만 동시에 생장(生長)하는 스토리텔링 구조를 취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영화 <워크래프트:전쟁의 서막>은 1994년 출시된 <워크래프트 1: 오크와 인간>의 세계관과 배경 스토리, 그리고 핵심 사건을 반복적으로 리-텔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게임을 통해서는 이해할 수 없었던 오크가 인간세상에 갑자기 등장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 상세하게 스토리텔링하고 있기 때문에 관객들은 그동안 게임을 통해 이해하지 못했던 스토리를 새롭게 접하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영화와 함께 출간된 소설 <워크래프트: 듀로탄> 역시 영화와 게임의 배경을 공유하고 있지만 게임과 영화, 모두에서는 미처 보여주지 못했던 서리늑대 부족의 지도자 듀로탄의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이어 족장이 되고, 의지할 수 있는 아내를 만나 고향을 등지고 호드에 합류하여 새로운 딸을 향해 떠나기까지의 이야기를 스토리텔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워크래프트>의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 전략은 시간, 공간, 캐릭터로의 전방위적 확장과 단순 스토리의 반복을 넘어 나선형의 진취적 구조 모델로 스토리텔링을 발전시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까지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의 대표적인 사례로 <워크래프트> 시리즈를 살펴보았습니다. 워낙 방대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고 다양한 미디어로의 스토리 확장을 꾀하고 있는 콘텐츠 이다보니 짧은 시간 모든 콘텐츠를 다루지 못한 아쉬움이 있습니다만, 게임 기반의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 전략을 이해하시는데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01. 이 강좌에 대해서
블리자드 사의 <워크래프트> 사례를 통해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의 전략을 자세히 살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