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애니메이션 감독에서 영화 감독으로의 변화
Q. 연상호 감독님은 아는 분들은 다 아는 국내 애니메이션 장르의 대가로 꼽히는데요. 애니메이션 감독님이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A. 원래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학생이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애니메이션을 좋아해서 TV에서 애니메이션을 하면 막 따라 그리고 그랬던 학생이었어요. 근데 ‘감독이 되겠다’는 생각은 진지하게 하지 않았고 애니메이션을 단순히 좋아하는 학생이었는데 중학교 정도 되니까 진로를 선택해야 되잖아요. 그래서 막연하게 '애니메이션 감독이 한 번 돼볼까?'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미술 학원도 좀 다니고 그랬었어요.
Q. 그러면 처음에 좋아하시다가 직업까지 가시게 된 계기가 된 거네요? 근데 한 편을 독학으로 만들어내신 거잖아요. 시간은 얼마나 걸리고 얼마나 투자하셨는지 그런 것도 좀 궁금하긴 하거든요.
A. 처음에는 대학교 1학년 때 영화를 한번 찍어보겠다고 캠코더를 하나 샀어요. 그때는 촬영용 캠코더가 꽤 비싼 것들이 있었어요. 브이에스 700이라는 기종인데 요즘엔 거의 쓰지 않지만 6미리 필름이라고 하는 굉장히 조그만 디지털 필름이 있는데 그거를 사용하는 카메라였어요. 그거를 처음 사가지고 그냥 뭣도 모르고 찍고 다닌거죠. 그런데 요즘에나 컴퓨터들이 굉장히 발달을 많이 했지만 그때는 편집 프로그램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어요.
핸드폰으로도 편집을 하는데 그때는 편집을 하려면 편집실에 가서 편집 기계를 다룰 줄 알아야 됐었는데 약간 과도기였던 게 그때 처음으로 프리미어라고 하는 편집 프로그램이 나왔었어요. 그걸로 이론적으로는 편집을 할 수 있었는데 그때 저희 집에 있는 컴퓨터가 꽤 좋은 컴퓨터였는데 용량이 2기가였어요. 2기가여서 영상 작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안됐죠. 근데 그때는 2기가 정도 되는 용량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어보겠다고 캠코더로 찍어서 영상을 조금 1분 정도 편집을 하면 용량이 꽉 차는 거예요. 그걸 비디오 테이프에 녹화를 하고 다음 분류 커트를 또 1분 정도 편집을 해서 또 비디오 테이프에 연결해서 녹화를 하고 그런 식으로 해서 영화를 1편 만들었어요.
어릴 때라서 20분 정도 되는 영화를 길게 만들었어요. 그 영화가 좀 잘 안되면서 영화가 영화제라도 되고 그랬어야 되는데 잘 안 되어서 시들해졌죠. 시들해 졌는데 카메라를 제 돈으로 60만 원 주고 비싸게 샀는데 그 카메라를 그냥 둘 수 없어서 이런 저런 기능을 보다가 콤마 찍기라고 하는 기능이 있단 걸 알게 되서 이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만들었죠. 그때부터 이제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시작한 거죠.
Q. 알겠습니다. 감독님이 작품을 만드는데 영향을 준 작품이나 감독님이 있으셨는지 있었다면 어떤 부분인지 굉장히 궁금한데 그거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 사실 모든 영상 쪽을 하는 감독들한테 많이 영감을 주는 작품들이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중반에 일본의 버블 경제 시대에 애니메이션들이 있어요. 그게 사실은 전 세계의 감독들한테 영향을 상당히 많이 줬죠. 대표적인 작품으로 <아키라>라는 작품이 있고 <공각기동대>라든가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의 작품들, 그런 작품들이 사실은 방대하게 전 세계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준 작품들인데 그 중에서도 굳이 몇 명을 뽑는다면 아키라라는 작품을 만든 '오토모 가츠히로(大友克洋)'라는 감독이 있어요. 그 감독이랑 최근에 5~6년 전쯤에 돌아가셨던 '곤 사토시(こんさとし)'라는 감독이 있었어요. <퍼펙트 블루>라든가 <동경 갓파더> 그런 작품을 만들었던 감독들한테 영향을 많이 받았죠.
아무래도 저 때는 일본 영화가 한국에 수입이 안됐어요. 극장에서 상영을 못했는데 이상하게 TV 애니메이션들은 대부분 일본 것들이었어요. 옛날에 어린이들이 한국 애니메이션인줄 알았는데 다 일본 애니메이션이다란 얘기가 있을 정도로 대부분 일본 애니메이션들이었죠. <은하철도 999>라든가, 지금은 이제 너무 거장이 되신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미래소년 코난> 같은 것도 다 일본 애니메이션들이었어요. 대부분 다 거장들의 작품을 보고 자랐던 것 같아요.
Q. <돼지의 왕> 그리고 <창> 그리고 <사이비>, <서울역> 등 20년 간 많은 작품들을 연출해 오셨잖아요. 지금 또 소개해주셨던 작품 중에 가장 애착이 갔던 작품이나 아니면 가장 아쉬움이 남았던 작품이 아무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이유도 좀 듣고 싶습니다.
A. 대부분은 다 애착이 가는 동시에 아쉬움이 남는 작품들인데요. 개인적으로는 제일 이상하게 애착이 많이 가는 작품이 <사이비>라는 작품이예요. <사이비>라는 작품이 굉장히 좀 이상하게 애착이 많이 가는 작품이고, 개인적으로 굉장히 아쉬움이 남는 작품은 최근에 만든 <서울역>이라는 작품이 굉장히 아쉽고요.
전 아무래도 첫 작품이 조금 더 애착이 가고 그럴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사이비>라고 하셔서 그 이유를 좀 듣고 싶어서요. <돼지의 왕>은 저한테는 너무 중요한 작품이죠. 처음으로 제가 이름을 알리게 된 작품이죠. 덕분에 칸느영화제에도 가게 됐고 그랬던 작품인데 일단 좀 그거 만들면서 고생을 너무 많이 했어요. 고생을 너무 많이 했었고 <돼지의 왕> 만드는 동안에 감정 같은 것들이 그러니까 영화의 내적인 감정보다 영화를 만들면서 느꼈던 외부적인 감정들이 더 큰 것 같아요. 그래서 <돼지의 왕>이 저한테 아주 중요했던 작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만들고 나서 다시 보지 않게 되는 작품이 <돼지의 왕>인 것 같아요.
그에 비해서 <사이비>라는 작품은 조금 더 안정적인 시스템 내에서 작업을 했고 영화적인 거에 최대로 집중을 하면서 만들었던 작품인 것 같아요.
Q. 다음 질문 드릴게요. 그런데 이 많은 작품 활동을 하시면서 실사 영화 제안도 많이 받으셨을 것 같은데 근데 그 동안 왜 애니메이션만 고집하셨는지 굉장히 궁금합니다. 실사 영화가 의외로 홍보하기에도 좋고 이름을 알리시기에도 조금 더 빠른 길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애니메이션만 고집했던 이유가 특별하게 있으실 것 같아요.
A. 사실 여러 이유가 있었는데 애니메이션을 원래 했던 사람이고 사실은 제가 아주 큰 성공이라든가 아주 큰 출세를 하려는 꿈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지금도 생각을 해보면 <사이비> 정도 규모의 작품을 그냥 만들면서 ‘아는 사람들만 조금 아는 감독이 되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었지, 뭔가 이렇게 유명한 상업 영화를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 자체가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제가 영화를 만든다고 해서 '잘 될까?'라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사실 실사 영화 제안을 많이 받았다고 했지만 시나리오를 몇 개 받긴 했는데 시나리오들이 좀 뭐랄까 마음에 안 들기도 했고 그런 상황에서 굳이 ‘제가 애를 써서 실사 영화를 할 필요는 없겠다’란 생각을 했던 거죠.
Q. 이러한 생각을 가진 감독님이 드디어 이번에 부산행을 통해 실사 감독님으로 참여하게 되셨잖아요. 이런 결심을 하게 된 계기가 있을 것 같아요. 무엇인지 말씀해주세요.
A. 사실은 영화 일을 하면 제가 주변 눈치를 많이 받아요. 주변에 제가 좀 믿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믿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뭔가를 해보자고 얘기를 할 때 완전히 제 생각만은 하지는 못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상황에서 제 작품인 <사이비>가 흥행이 잘 안 되서 손해가 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비>라든가 <서울역> 같은 작품을 따로 투자를 해주고 있었던 배급사 '뉴(NEW)'의 장경익 대표가 실사 영화를 해보자는 얘기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었어요. 규모가 큰 실사 영화를 한번 해보자라는 얘기를 하고 있었고 마침 또 저희 집 근처 사는 이동하 프로듀서가 실사 영화를 해보자는 얘기를 하고 있었어요. 이제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이동하 피디한테 개인적으로 신세를 진 것들이 있다 보니까 개인적 신세라 하면 돈을 꾸거나 이런 건 아니고 <사이비>라는 작품을 할 때 정신적으로 좀 힘든 게 있었는데 <돼지의 왕>이라는 작품을 하고 그 다음에 이제 <사이비>라고 하는 시나리오가 있었는데 그걸 어떻게 투자를 받아야 할지 모를 때 이동하 피디가 뉴의 장경익 대표를 처음 만나게 해준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이제 집이 가까우니까 자주 영화 얘기를 하다가 이동하 피디가 그 책을 한 권 줬어요. 책을 빨리 읽고 검토를 해달라고 책을 줬었어요. 그 책이 일본 소설이었어요. 검토를 해달라 해서 이게 실사 영화를 하자라는 뜻이라는 걸 잘 알았었죠. 근데 그때는 저희 아내한테도 얘기를 한 게 이동하 피디가 이만저만 책을 줬으니까 책이 아주 나쁘지 않으면 실사 영화를 해야겠다 이렇게 얘기를 했었어요. 그래서 빨리 읽어 봤는데 아주 나쁘더라고요. 아주 나빠서 내일 당장 가서 못하겠다 이걸 얘기를 해야 되는 상황이었는데 얘기하기도 미안한 거예요. 그래서 밤새 생각을 한 거죠. 그냥 못하겠다 하면 안 되니까 다른 걸 해보자고 얘기를 해야겠다 했는데 하루 밤 사이에 어떤 이야기 아이템이 나왔었어요. 그래서 이러이러한 걸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제가 했고 그러다 이제 받아들여서 부산행이 시작된 거죠.
Q. 아무래도 애니메이션과 실사 연출은 다를 텐데 시작하실 때 두렵지는 않으셨어요?
A. 두렵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지금은 여러 가지 것들이 많아져서 다음 작품을 하는데 두려움 같은 게 있기도 한데 막상 그때는 두렵지 않았던 것 같아요. 워낙에 초반 스텝분들이 꾸려질 때 스텝분들이 좀 잘해주셨어요. 편안하게 해주셨고 오히려 제가 연출을 편안하게 할 수 있게끔 많이 도와주셨던 것 같아요.
Q. 이러한 노력 덕분인지 국내에서나 해외에서 실사 영화인 부산행이 굉장한 인기를 얻었습니다. 심지어 저도 너무 너무 재미있게 봤고요. 는 어떻게 보면 실사 영화 감독으로서의 변신에 성공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감독님이 생각하는 변신의 성공 포인트가 있다면 살짝 알려주세요.
A. 일단은 시기가 좀 좋았던 것 같고요. 시기라고 하면 소재적인 면이나 이런 것들이 이미 여러 대중들이 이 소재에 대해서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 됐고 그런 과정에서 한국에서 좀비라고 하는 소재가 나온 적이 없다 보니까 그런 거를 기다리고 있던 대중적인 욕구가 시기적으로 좀 잘 맞았던 것 같아요.
2. 20년간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원동력은 확고한 가치관
Q. 감독님에게 천만 관객이라는 타이틀은 누구보다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요. 그만큼 어려운 시절을 또 보내셨잖아요. 그래서 그 타이틀을 따기 위해서 제일 어려웠던 상황 하나만 들어볼 수 있을까요?
A. 그게 사실은 영화를 35살 정도 먹었을 때였을 텐데 그만할까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왜냐하면 오랜 세월 동안 이걸 했는데 말 그대로 비전이 없다 보니까, 결과물도 나오지 않고 그러다 보니까 이거는 이제 더 해봐야 소용이 없을 것 같다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지금이라도 좀 빨리 다른 일을 알아봐야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 때 친한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는 만화가였는데 그 친구는 옛날부터 잘 나갔었어요.
'송곳'이라는 작품을 그린 최규석 작가라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는 대학 졸업할 때부터 바로 전업 작가로 작업을 하고 있었던 친구였는데 그 친구가 굉장히 용기를 많이 불어 넣어 줬죠. 근데 한동안은 그만해야겠다라는 생각을 거의 굳혔을 때였는데 그 친구가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너는 재능이 있으니 계속 해라'라는 얘기를 하면서 만약에 혹시 계속 했는데 재능이 없다라고 한다면 예를 들면 노숙자가 돼서 죽을 수도 있는 걸 텐데 굳이 잘나가는 사람이 돼서 죽으나 노숙자로 죽으나 똑같지 않냐. 그런 얘기가 의외로 개인적으로는 위안이 됐었어요. 왜냐하면 그 전에는 작업을 해서 성공하고 싶다라는 욕구가 되게 강했기 때문에 많이 답답하고 그랬었는데 조금 더 편하게 작업을 할 수 있겠더라고요. 나중에 정말 전혀 성과를 못 얻은 채로 일종의 무시를 당하는 삶을 산다고 하더라도 그거 자체가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었어요. 그런 것들이 일종의 위안 같은 게 됐었죠.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지금 생각해보면 미묘한 부분인 것 같아요. 왜냐하면 작업을 하거나 이럴 때 사람 마음속에는 그런 것들이 있거든요. 예를 들면 무시당하지 않고 존경 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라는 그런 게 마음속에 그게 있는 것 같아요.
근데 사실은 모든 사람이 다 그럴 순 없는 거잖아요. 근데 일종의 조롱이나 무시 같은 걸 당하면서 계속 살아가는 사람도 있어요. 근데 가끔 그런 걸 느낄 때 무시당하거나 조롱 당하는 삶을 사는 사람의 문제는 그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그걸 무시하거나 조롱하는 사람의 문제인 거거든요. 그들이 사는 거에는 문제가 없는 거죠. 그런 것들을 좀 느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옛날에는 막연하게 아까도 얘기했지만 어렸을 때 '좀 잘나가는 사람이 되고 싶어', '근데 공부는 못해', '공부를 못하면 조롱을 당해', 이런 것들에서 공부도 못하지만 잘 나가는 사람이 되고 싶어라는 마음으로 애니메이션을 시작한 게 처음이었다고 한다면 그 즈음에는 생각이 바뀌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미 제가 제 자신을 생각하고 있는 마음 자체가 어떠한 사람을 계층으로 나눠서 존경받는 사람과 조롱받는 사람, 무시당하는 사람이라는 계층을 이미 저 자신이 나누고 있는 거죠. 거기에서 사실은 못 벗어나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얘기들이 위안이 되기도 하고 그러고 나니까 훨씬 더 편하게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Q. 다음 질문 드릴게요. 지금 <부산행>이 있기 전에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은 감독님의 출세작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이 역시 인정받을 때까지 상당히 고전을 많이 했다고 들었습니다.
A. 아무래도 대학교 1학년 때 야심차게 애니메이션을 해보겠다고 했는데 워낙에 좀 잘 안됐었고 금전적인 건 둘째 치고 작품적으로도 인정을 받았어야 했는데 그게 좀 잘 안됐죠. 그게 좀 잘 안되다 보니까 중간에 회사 생활도 좀 하고 또 그 회사도 대표가 횡령을 해서 50억을 가지고 나르셨어요. 큰 회사였는데 아직도 안 잡히셨더라고요. 그래서 저희 회사도 망했어요. 그래서 망하면서 당연히 취업을 해서 월급쟁이 생활을 하다가 회사가 망하다 보니까 이제 자연스럽게 프리랜서가 되고 또 회사를 취업할까 하다가 작업을 더 해보자란 생각으로 작업을 했는데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렸어요. <돼지의 왕>이 한 35살 그 근처에 만들었으니까 작업 한다고 하고 15년 정도 흘렀던 것 같아요.
Q. 너무 너무 고생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돼지의 왕>이 다시 부활하게 된 계기가 있을 것 같은데요.
A. <돼지의 왕>은 사실 그때는 너무 안 되고 나이도 먹고 그러다 보니까 이제 관둬야겠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어요. 애니메이션 자체를 관두고 지금이라도 조금 안정적인 회사에 취업을 하던가 그리고 그때 당시에는 이제 아는 형들이 이런 자그마한 애니메이션 회사를 하는 형들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일을 도울까 그런 생각을 한참 하다가 <돼지의 왕>까지만 해보고 관둬야겠다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돼지의 왕>이라는 작품을 혼자서라도 완성을 해보자라고 작업을 좀 하고 있었는데 운이 좋게도 상상마당에서 하는 독립 영화 제작 지원 같은 게 있었어요. 거기에서 조금 지원금을 받아서 작업을 하게 된 거죠. 물론 <돼지의 왕>이 나중에야 칸에 가게 됐지만 처음에 완성이 됐을 때는 칸 영화제에서 틀지 않았어요. 그 이후로 해외 영화제에 계속 출품을 했는데 베니스 영화제에도 출품을 하고 그랬는데 다 잘 안됐어요.
하다 못해 전 세계 조그만 영화제에서도 다 떨어졌어요. 그러다 보니까 어떻게 보면 마지막 작품이다라고 생각하고 만든 작품이 사실은 굉장히 익숙한 실패를 겪다 보니까 낙담을 상당히 했죠. 심지어는 부산 영화제에도 출품을 했었는데 부산 영화제에서 경쟁 부문에 틀 수 없겠다라는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작품의 수준이 너무 낮기 때문에 경쟁 부문에서 틀기는 힘들 것 같다고 그러고 있었어요.
미국 잡지 담당인 외국 기자가 있는데 그 기자가 한국에 부천 판타스틱 영화제 때문에 취재를 하러 왔다가 보통 외국에서 크리틱 하시는 분들이 한국에 들어오면 영화 진흥 위원회에서 아직 개봉하지 못한 영화들을 해외 쪽 사람들한테 보여주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그 기자가 영진위에 가서 아직 개봉하지 않은 영화들을 보다가 돼지의 왕이란 영화를 보고 봐야겠다 해서 요청을 해서 온 거죠. 그 기자가 <돼지의 왕>을 너무 좋게 본 거예요.
그래서 부천 판타스틱 영화제의 뒷풀이 자리에서 상상마당의 팀장을 만나서 “혹시 너희가 <돼지의 왕>을 제작하지 않았냐, <돼지의 왕>을 어떻게 배급할 생각이냐” 이런 얘기를 했었는데 그때 “부산 영화제의 경쟁에 초청이 안돼서 비경쟁 부문에 틀게 될 것 같다”고 얘기를 했더니 그 기자가 “왜 이 영화를 비경쟁에 트냐 당장 부산 영화제에 출품하는 걸 중단하고 도쿄 쇼트쇼츠영화제의 경쟁 부문으로 내라, 거기 경쟁 부문에 추천을 하겠다”라는 얘기가 됐었어요. 그러니까 부산 영화제 프로그래머분이 무슨 도쿄로 가려고 그러냐, 경쟁에 넣어주겠다라고 얘기가 돼서 사실은 경쟁 부문에 가게 된 거죠. 그게 어떻게 보면 대단한 운이었죠.
Q. 그래서 이제 다시 <돼지의 왕>이 부활하게 되고 많은 분들이 알게 되고 하는 계기가 있었군요. 좋습니다. 어찌 보면 준비된 사람에게 기회가 온 거잖아요. 자신의 꿈을 위해서 지금도 하루도 빼놓지 않고 혹은 정기적으로 하고 있는 일이나 습관이 있으신지요?
A. 요즘에는 일이 너무 많다 보니까 그냥 일을 하는 게 대부분이고요. 근데 그 전에도 혹시 모르니까 글 같은 건 많이 써놓으려고 했어요. 원래 가지고 있던 아이템이나 짤막한 생각들을 머릿속에만 갖지 않고 몇 줄이라도 써 놓자란 생각도 했고 그런 거는 계속 했었던 것 같아요.
거의 매일 해요. 지금은 일로써 하는 거다 보니까 혼자 하는게 아니라 여러분들이랑 같이 하죠. 작가들이랑 같이 얘기를 하면서 하죠.
Q. 알겠습니다. 제 2의 연상호를 꿈꾸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A. 일단은 나이가 좀 어리다, 20대 초반이다라고 한다면 그리고 20대 초반이 아니더라도 일이 없다라고 한다면 영화 좀 많이 보라고 하고 싶어요. 영화랑 그 다음에 음악하고 그게 이제 그림일수도 있는 거고 좀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거 있잖아요. 그런 거를 좀 많이 해놓아라라는 얘기를 하고 싶어요. 만화책 같은 것도. 왜냐하면 사실은 그런 것들이 굉장히 무의미해 보일 수도 있는데 그런 것들이 창작의 기반이 되는 거고 나중에 일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면 볼 시간이 없어요.
시간이 많이 부족하게 돼서 음악 같은 것도 어떤 발견 같은 걸 하잖아요. 음악 같은 것도 이것 저것 듣다 보면 생각지도 않았는데 굉장히 좋은 음악을 발견하기도 하고요.
근데 사실 일을 하게 되면 발견을 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누가 추천해주는 걸 보던가, 아니면 누가 추천해주는걸 듣던가 이 정도가 돼요. 그러니까 아마 좀 20대 초반이나 10대 후반에 이런 걸 준비할 시절에 남는 게 시간이기 때문에 사실 그런 시간들을 잘 무언가를 보는데 썼으면 하는 게 바람이에요.
01. 이 강좌에 대해서
몇 십년간 작품을 제작해 온 이야기를 들으며 애니메이션 감독에서 영화 감독으로 변화할 수 있었던 성공 포인트를 알아가면서, 새로운 도전에 대한 용기를 얻고자 합니다.
02. 강사 소개
연상호 (애니 및 영화 감독)
03. 강사 이력
-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 '창', '사이비', '서울역' 등 제작 - 영화 '부산행' 제작 - 2013년 제46회 시체스영화제 애니메이션 최우수 작품상 - 2014년 제34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국제비평가연맹 한국본부상 - 2016년 제25회 부일영화상 특별상, 제49회 시체스영화제 감독상 - 2016년 제37회 청룡영화제 최다관객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