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아버지였거든요. 아버지의 우리가 잊고 살았던 존재 그 아버지를 현실 세계에서 다시 재현하고 싶었고 보이지 않는 마음까지도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러다보니 가장 아버지와 가장 잘 맞는, 파트너처럼 보이는 소를 같이 동격으로 놓고 현실 속에 끌어온거죠. 그것은 현실 세계에 있는 아버지와 소였습니다. 상당히 서로 닮아있어요. 우직하고 정직하고. 늘 헌신하고 희생하는 그런 측면들. 그래서 두 존재를 현실세계로 불러온거고. 그래서 그들이 보여주는 삶. 그래서 저는 이것들을 그냥 사금파리라고 한적이 있어요. 사금파리라는 것은 도자기의 파편이죠. 한 때는 상당히 유용했으니 지금은 깨어져서 더 이상 기능도 하지 못하고 가치고 없는. 그래서 워낭소리 자체는 그렇습니다. 그 깨어진 사금파리, 이것은 삶의 원형질이라고 말하고 싶은데요. 이런 것들을 제 주관적인 판단에 의해서 가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을 죽 모아서. 다시 완벽하지 않고 온전하지 않지만 다시 옛날의 도자기로 돌려주는 그런 어떤 일을 저는 워낭소리라고 생각을 했고, 그 작업이 바로 소리를 찍는거였다. 소리를 찍는다는 것은 아까 제가 말했던 비디오의 허상에 대한 반댓말일 수도 있습니다. 정상인이 바라보는 세상 눈으로 보이는 세상의 진실은 보이는거가 될 수 있겠죠. 그렇게 믿겠죠. 하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 사실은 비디오 그림이라는 것은 허상일 수가 있어요.
진짜 원형질은 소리다. 그래서 근접 촬영 못하고 멀리 지켜보면서 제가 선택했던 것은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마이크 달아드리고 떨어져서 소리를 기록하는거 였어요. 그래서 어떤 측면에서는 그림 자체가 정말로 리얼하다거나 이런 것들이 빠질 수 있습니다.그리고 매번 반복되는 일상 중에, 저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물론 반복되는 일상 하나하나가 다 다른 시간들에 존재하는 그림들이지만 거기서 보여지는 할아버지의 마음이나 할머니의 마음 이런 것들이 사실은 반복되어진다 그래서 저는 사실 가장 대표적인 그런 어떤 하나의 장면만을 선택을 해서 일단 비디오로 보여주고 상황이 똑같다는 전제하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늘 싸우는 장면을 봅시다. 똑같은 일 가지고 싸우잖아요? 다만 장소만 다르고 아니면 동일한 장소에서 계속 같은 얘기만 합니다. 예를 들면 소 팔라는 이야기도 그렇고. 그 소 팔라는 소리는 사실은 진실이죠. 그런데 그림은 예를 들어서 다른 상황이 될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소리를 찍었기 때문에 비디오하고 안 맞을 수가 있다. 이런 측면들 때문에 비디오와 오디오가 안 맞아서 이건 판타지라고 이야기 하시는 분도 있고요. 근데 저한테는 중요하지 않다. 제가 중요한 것은 그 서사성보다는 그들이 삶 속에서 과연 어떠한 삶의 진정성을 보여줄 것인가 이부분이 중요했기 때문에 저는 소리로 대신하고 싶었던거죠. 그래서 워낭소리 자체의 제목도 이미 소립니다. 그래서 워낭소리라고 하는 것은 그냥 아버지와 소가 살아있다라는 맥박의 의미. 일종의 메타포죠. 그런 개념으로 영화 내내 소가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워낭소리가 들립니다. 이것은 일종의 살아있음의 맥박을 대신한 은유다. 메타포다. 이런 측면이 될 수 있고요. 워낭소리 안에는 여러 가지 소리가 있죠. 새소리, 풀벌레소리, 라디오소리, 할머니의 잔소리 지청구소리, 또 할아버지의 아파하는 신음소리, 또는 농기계소리 또는 데모하는 시위대의 함성소리. 그래서 이 소리들은 2005년부터 2007년도의 봉화에 살아있는 삶의 원형질이 아닌가 그렇게 판단을 한거죠. 그래서 그런 것들을 제가 보여주는 것이 말 그대로 우리 관객들한테 그동안 잊혀지고 사라져가는 어떤 전개들에 대해서 각성하게 되고 떠올리게 되고 추억하게 되고 그래서 저는 큰 전략이 이거였습니다. 노스텔지어. 향수라고 그러죠. 그걸 자극하자. 그래서 제가 찍는 방법도 그랬어요. 아까 소리를 찍었고, 관계를 찍자.
그럼 관계란 뭐냐 하면 할아버지와 할머니, 또는 할아버지와 소, 소와 할머니, 또는 젊은 소. 그래서 혹자들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삼각관계다 사각관계다. 할아버지 하나 남성을 두고 벌이는 세 여성의 삼각관계 이렇게 이야기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은 뭔가 사건을 만들어낼 수 있는 요인들을 가지고 있지요. 그래서 소를 안 팔겠다는 할아버지와 소를 팔라는 할머니의 관계, 또 젊은 소와 늙은 소의 대립관계 여러 이런 부분들이 관계를 통해 이루어졌어요. 그래서 카메라 두 대로 저는 그 관계만을 찍자해서 예를 들자면 그렇습니다. 젊은 소와 늙은 소를 쭉 이렇게 카메라로 주구장창 계속 지켜보면 뭐가 나옵니다. 그런 과정이 힘들지요. 그래서 카메라맨들이 많이 도망을 가더라고요. 못 찍겠다 도저히. 근데 그럴 적에 어떤 거시적인 것을 담으려고 했다기 보다는 정말로 미시적인 것들 이런 쪽을 집중하다보니까 그런 관계를 계속 집중할 수 있었고, 그 관계를 찍다보니까 그 관계가 만들어내는 어떤 가치나 정서들이 있었어요. 이것들이 계속 세월이 가고 시간이 가면서 계속 쌓인거죠. 쌓여서 산을 이루고. 단층처럼 층을 이루면서 어느 지점에서 그 관계가 깨어지면서 싹 무너지는 구조. 무너진다는 것은 뭐냐면 관객들에게 어떤 감정을 감흥을 준다는거죠. 이걸 다른 말로 하면 감동이겠죠? 그 감동이 우르르꽝꽝하면서 폭발적인 그런 감동이 아니고 서서히 사람을 두고두고 괴롭히는. 여진처럼 남아서 두고두고 괴롭히는 그것이 뭐냐면 고향이고 아버지고 어머니고 기억들입니다. 그래서 영화보고나면 사람들이 나가자마자 바로 부모님한테 전화를 안하면 미칠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도록. 어떤 측면에서는 좀 야비한데요. 그런 불편한 정서들을 좀 만들고 싶었고 그래서 저는 기존의 서사성을 중심으로 하거나 뭔가 농촌의 현실을 다 끄집어내가지고 이것저것 다 보여주는 그런 방법 보다는 최대한 절재하고 비우는. 저는 워낭소리를 하면서 늘 했던 이야기가 비우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잘 비우는 것이 성공하는 것이다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왜 그러냐하면 저는 15년동안 다큐멘터리를 하면서 수많은 실패를 했습니다.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제가 워낭소리를 촬영들어가기 직전에 이미 사북탄광에서 6개월 동안 찍었던 작품이 실패를 하면서 쓰러졌어요. 쓰러져서 제가 얻었던게 빚하고, 정신적인 트라우마라고 그러죠. 공황장애를 앓게 되었어요. 다른 말로 쉽게 하면 울화병입니다. 그래서 그런 상태로 워낭소리를 촬영을 들어갔고, 그러면서 저는 저한테 워낭소리가 힐링무비가 된거에요. 왜 힐링무비가 되었느냐 나는 욕심이 많은 사람인데 그 할아버지의 느릿느릿한 삶의 걸음을 따라가다보니까 자연스럽게 안정이 됐고, 또 할아버지가 보여주는 정직한 노동, 이런 것들 때문에 야 세상이 별거 아니구나. 저 무지랭이 촌부도 정말로 돈이 아닌 자기의 어떤 삶을 저렇게 정성스럽게 진실되게 살아가는데 나는 정말로 허영과 욕심이 많았구나. 이런 생각이 들면서 마음을 좀 비우게 되었어요. 절제하는 방법도 좀 배우고. 그래서 제가 편집 할 때는 정말로 쌓고 또 쌓고 허물면서 선택했던 것이 비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워낭소리는 잘 비웠기 때문에 잘 버렸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겁니다. 제가 기존의 다큐멘터리 방법으로 이 워낭소리를 제작한다고 했다면 아마도 그런 작품이 되었겠지요. 계절감 분명하고, 3,4년 동안 찍어서 테이프 분량 많고 그 다음에 좀 시끄러워졌을 겁니다. 연출자가 막 뛰어가서 이거 어떻습니까 저거 어떻습니까. 그리고 농촌의 현실은 이렇기 때문에, 뭐 FTA가 어떻고 이런 얘기들은 뉴스에도 나오고 매일 나옵니다. 또 하나의 같은 이야기가 됐겠지요. 하지만 제가 사실은 하고자 했던 것은 그런 아무런 의미가. 그러니까 아무리 의미가 있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그 의미들이 전달이 되지 않는다. 혹은 그것을 봐줄만한 시청자나 관객들이 없다라고 한다면 아무런, 이게 무용지물이 될겁니다. 그래서 어쨌든간에 그런 진실, 그런 정서들을 전달해야 한다. 그냥 전달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적어도 다큐멘터리로 사람들이 봐줄만하다. 그래서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재미와 감동도 있어야 된다. 그래서 그런 관계를 찍고 소리를 찍고 이렇게 그런 방식을 동원하다보니까 사실은 극영화처럼 된 거에요.
우리가 사는 삶은 사실은 극영화입니다. 극영화라는게 뭡니까. 삶을 허구가지고 있는 것처럼 재현해내는거죠. 거짓말이죠. 다큐멘터리는 거짓말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의 삶이 아닙니까? 있는 그대로의 삶은 아까 제가 그랬잖아요.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저는 연출자이기 때문에 연출을 해야되고. 그런측면에서 내러티브라 그러죠. 이야기 구조도 필요하고. 내러티브의 인과관계를 통해서 사람들한테 긴장하게하고 감동받게하고. 그런 작업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연출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너무 어떤 다큐멘터리 본질만을, 근본만을 이야기하다보니까 사실은 소통하지 못했다라는 측면이 너무 많았어요. 제가 다큐멘터리 근본자들을 비판하자는게 아니고, 저는 타큐멘터리 본질은 지켜가면서, 적어도 진행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좀 더 창조적이고. 그래서 이것이 하나의, 기존의 근본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고 다큐멘터리 본질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고. 밥상으로 치자면 메뉴 하나 더 얹는 이런 식으로 해석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 세상은 다양하잖아요. 다양성이 존중되어야 되고, 그 다양성에 맞춰서 논픽션이나 다큐멘터리 메뉴도 다양해져야 한다.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하는거죠. 그래서 언제까지나 아주 싱싱하고 살아있다고 해서 생선으로 치면 날생선만을 자양분이 있기 때문에 맛이 없어도 먹으라고 하는 것과 이왕이면 그 원형질이 살아있고, 날 것의 본질이 살아있다라고 한다면, 그것을 좀 더 조미도 하고 좀 맛있게 해서 좀 더 맛있게 먹여주면 되잖아요. 먹을 수 있으면 되잖아요. 저는 그렇습니다. 그래서 다큐멘터리를 희화화하자 코메디를 만들자 이것도 아니고 다큐멘터리는 그냥 삶을 다룰 뿐입니다. 삶이 중요하죠. 그 삶이 보여주는 여러 가지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그것을 그런 현실들을 창조적으로 다시 표현하거나 재현하자. 이것이 다큐멘터리들이 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측면에서 운 좋게도 아마 7할이 운이고 3할 정도가 제 노력의 반영이 아닌가. 그래서 어찌되었든 관객들과 소통할 수 있었던, 그래서 사실은 많은 관객이 들었고, 그리고 어떤 영화산업에 있어서 도움도 되었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것이 뭐 어떤 개인적인 사업적인 욕망 때문에 한 것도 아니었고, 저는 이 워낭소리가 나오고 나서 이것이 한 연출자의 어떤 노동의 가치나 영화적인 어떤 열정, 이런 측면으로 해석이 되는 것이 아니고, 자꾸 수치나 자본의 논리대로 해석이 되는 부분들을 가지고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아프고, 다큐멘터리 하시는 분들은 늘 삶이 있으면은 저는 이러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다큐멘터리의 아버지라 불리는 로버트 플래허티는 그사람의 북극의 나누크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자기의 현실에 대한 부정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을 해요. 당시에 1920년 북극의 나누크가 나오기 전에는 여러 가지 영화들이 있었습니다. 영화는 최초의 영화는 다큐멘터리죠. 그리고 그 다큐멘터리들이, 예를 들자면, 뉴스, 영화라든가, 계몽영화 또 기행영화, 당시의. 그래서 어떤 문명을 가진 쪽에서 비문명의 어떤 대상들을 만나서 기행하듯이 희화화 시키면서 예를 들면은 북극의 나누크의 한 장면 중에 흉기를 보고서 어색하게 웃는다거나 레코드를 씹어먹는다거나 해서 원시성들을 부각시켜서 사람들에게 어떤 호기심을 주기도 했잖아요. 근데 이것이 로버트 플래허티가 그런 어떤 기행영화의 성격도 보여줬지만 또 한 편으로 그냥 비문명의 호기심만을 계속 강조할 수 없다에 내가 한 작업들은 다 잘못되었다 생각을 하고 삶의 본질로 들어간거에요. 그래서 그 영화는 사실은 호기심의 측면보다는 그냥 그 나누크의 주인공들이 그 안에 이누이트 주인공인 나누크를 중심으로 해서 그들만의 삶을 쭉 관찰하고 그렇게 지켜보면서 하나의 어떤 극적인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완성한 것이 그 영화입니다. 그 영화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 현실, 자기가 현실에 처한 상황들을 부정하지 않은, 나올 수 없는 영화였기 때문에.
저 또한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을 좀 더 다르게 다양하게 해석해서. 저는 앞서서 밝혔듯이 다큐멘터리는 기록이라는 근본적인 측면에 너무 매몰되지 말고,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삶을 사실은 그대로 재현하는거다라고 생각하는거다. 삶의 원형질을 그대로 재현하는거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해석의 문제이다. 저는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싶고요. 제 다큐멘터리로서 워낭소리는 한국 다큐멘터리사에서 적지 않게 많은 성과와 논쟁을 같이 가져왔습니다. 저는 워낭소리를 만들 때 어떤 정치적인 올바름, 미학적인 성취를 지향하고 만들지 않았고 다만 삶을 어떻게 진정성있게 관객들한테 전달할 수 있을까, 재현할 수 있을까, 이 부분만을 중점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많은 논쟁을, 비판을 받아가면서 사실은 관객과 소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 측면으로 저는 워낭소리를 완성을 한 것이고, 그렇게 받아들였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거지요.
(자막)
Question& Answer
질문: 다큐멘터리 감독을 왜 선택했는가?(18분 33초)
저는 그런 것을 사실은 생각하고 하지는 않았어요. 저는 처음에 애니매이션을 지향을 했는데 돈이 없어서 유학도 못가고 그래서 직접 그렸던 동화 애니매이션을 포기하고 애니매이션 연출자가 될까 생각에 노력을 하다가, 돈이 없어서 잠시 방송 프로덕션에서 은거를 했어요. 잠시 머무르면서 연출이나 배워보자 생각하고 했던거고 이렇게 기획하고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한 15년 하다 보니까, 그 과정 중에서 피디로서 역량의 부족, 정체성의 혼란, 이런 것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지금의 방송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에요. 방송이라는 것은 광고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어찌되었던 간에 자기 자신의 욕심대로 만들 수가 없지요. 표준규격 데로 만들어지면 됩니다. 그것이 어린이 프로든 노인프로든 기행프로든. 저는 좀 심하게 말하자면 영혼이 없는 프로를 많이 했다고 생각해요. 그냥 하기 위한 프로들. 이걸 하다보니까 언제부터인가 좀 이건 아니다. 내가 무얼 하고 있는가 해서 그래서 다큐멘터리를 시작했다기 보다는 정말로 제가 하고 싶은 작품을 해야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게 사실은 다큐멘터리가 된거죠. 넓게 이야기 하면 논픽션을 한거고요. 워낭소리를 다큐멘터리라고 해주시니까 저는 다큐멘터리로 받아들입니다. 그건 다 말장난인거 같고요. 중요한 것은 삶을 어떻게 정말로 연출자의 해석에 의해서 재현해내느냐. 진성성있게 재현해내느냐 이 부분이 중요한거지, 사실은 다른 방법들이나 이런 것들은 저한테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별로 다큐멘터리스트가 아니에요. 그래서 욕을 많이 얻어먹은 것 같습니다.
질문: 최초 작품을 만들 때 시놉시스 완성 정도와 실제 촬영시 돌발변수는?(20분 44초)
한국 다큐멘터리는 미국이나 선진화된 나라와는 다르게 제작비 여건 때문에 준비 기간이 거의 없습니다. 특히 방송사나 또는 외주 제작으로 독립 피디라고 그러죠. 독립 제작사 이런 쪽에서는 작가들이 리서치를 많이 하고 작가들은 절대 데스크를 떠나지 않습니다. 현장을 가보지 않지요. 그리고 만들어진 트리트먼트라고 그러죠. 저는 그것이 사실은 소설 쓴다고 생각해요.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들을 써놉니다. 그걸 가지고 현장가서 뭘 찍겠습니까. 저는 그런 것들을 부정하고요. 그래서 작가 시스템 보다는 저는 혼자서 하다보니까 그만큼 시간이 많이 걸렸고 실패를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장점 하나는 있어요. 데스크에서 만들어진 것보다는 내가 직접 현장에서 같이 하면서 얻어낸 지식이기 때문에 버릴 것이 없고. 그런 측면. 약간은 좀 거칠고 투박하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꿈틀거리는 원형질이 있기 때문에 그런 측면에서 촬영을 했었고.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한국에서 타큐멘터리를 하시는 분들이 속성으로 많이 하잖아요. 그러다보니까 사실은 진정성을 제대로 뽑아내지를 못합니다. 상당히 열악하고 척박하죠. 그래서 워낭소리 같은 경우에 극영화 형식이 되었기 때문에 자꾸 트리트먼트가 있느냐 사전콘티가 있느냐 시나리오가 있느냐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만은 저는 시놉 같은 것을 생각해본적이 없어요. 다만 방송용으로 제출을 하라 그래서 자꾸 소를 강조하길래, 나는 아버지 얘기를 하려고 하는데 왜 자꾸 소 얘기를 할까 그래서 처음에 제목을 소 가라사대라고 한적은 있습니다. 그런데 완전히 계몽적인거 잖아요. 소가 가라사대 뭐. 그래서 이건 안되는구나. 방송 또 이렇게 사전제작을 아무리 했다하더래도 또 다시 맡겨버리면 또 똑같은 소 가라사대가 되는구나. 그래서 그런 것이 싫어서 사실은 제 방식들을 계속 고집하기 위해서 시간이 많이 걸렸던거에요. 그래서 제작기간 3년, 그다음에 편집 기간 1년 반, 그다음에 기획하고 주인공 찾는데 한 7년, 8년 한 10년 걸린거에요. 10년걸린거고. 그래서 이렇게 하면 또 하나의 교훈을 얻을 수 있어요. 이렇게 만들면 쪽박차거나, 아니면 성공할 수 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는데, 저 이전에는 아마 쪽박이 대부분이었고요. 그래서 아마 나중에 하실 분들은 또 우려되는게 있습니다. 이충렬이가 만든 워낭소리가 300만 가까이를 들였기 때문에 나도 저런걸 해야되겠다해서 다큐멘터리가 다양성이 없어지고 똑같은 방식의 똑같은. 아마 그런 아이템들을 하지 않을까. 이미 실제로 지금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너무 다큐멘터리 본질이 보이지 않는 이런 다큐멘터리들이 상당히 난무할 것 같다 이런 걱정은 됩니다. 그래서 그게 현실이고요. 찍는 과정에서 어려움들은 많죠. 저는 콘티가 있었으면 이미 그들은 배우겠죠? 할아버지 할머니도 배우고, 소도 배우겠죠? 콘티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 분들한테 적어도 연기자상들은 줘야되요. 아카데미 뭐 연기자상이나 아니면 배우상이나 줘야하는데 그게 아니기 때문에 소가 언제 죽을 줄 압니까. 예를 들어서 할아버지가 장터에서 우시장에서 소를 팔았으면 어떻게 됩니까. 또 끝나는거에요. 그리고 소가 내가 원하는 시점에 죽어줬으면 좋겠다해서 죽어줍니까? 그래서 저는 제작자랑 많이 싸웠어요. 아니 일년 안에 죽는데서 허락을 해줬더니 왜 소가 안 죽느냐. 그래서 실제로 몇 년을 더 살았잖아요? 그래서 제작비 많이 깨진다고 해서 저는 심지어 이렇게 촬영 내려갈 때 마다 그런 기도를 한적이 있어요. 제발 이번에 좀 죽어다오. 이만큼 사실은 절박한겁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소의 눈물이 진짜인가 아닌가 이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분이 현장에 와서 확인한게 아니잖아요? 나는 그냥 그렇게 표현하고 싶어서 편집을 한건데 왜 클로즈업을 쓴 이유가 배경이 다른데이기 때문에 그런거 아니냐 이런 어떤 비판을 하시는 분도 있는데 저한테는 그런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 해석에 따라서 제가 원하는 컷을 붙이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걸 중요하게 해서 쓸데없는 컷을 낭비하기 싫다, 이런 측면도 있고요. 그래서 상당히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는 것이 한국에서는 재정적인 부분도 그렇고 현실 자체도 만만하지 않다 하지만 다큐멘터리가 대중화되기 위해서는 많은 연출자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다음에 아주 탄력적인 다양한 생각들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라고 보고 있는거죠.
질문: 주인공들을 어떻게 섭외하게 됐으며 감독이 꼽는 명장면은?(26분 13초)
그 당사자 주인공들을 섭외하게 된 것은 제가 이 작품을 하게 된 동기가 아버지 때문이었고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을 좀 상쇄하기 위해서 면죄부를 좀 얻기위해서 시도했던 것이 워낭소리였죠. 당시 1998년도 외환위기가 닥치고 한국의 아버지들이 힘들었잖아요. 퇴출도 당하고 직장에서도 쫓겨나고. 그런 그 아버지들이 퇴물이 되어가는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제 아버지를 떠올렸고, 저 또한 나를 키워준 아버지를 오랫동안 잊고 살았구나. 그런 어떤 잊어버렸던데 대한 미안함 이런 것들이 있었고해서, 저는 그런 아버지들을 눈에 보이는 아버지, 아버지를 구성하는 유전자, 품성들까지도 한 번 한국 사회에서 꺼내오고 싶었다 현실로. 그래서 기억 속에 아주 정말 열심히 일하고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아버지. 그 다음에 오랜 파트너인 소를, 품성이 닮은 소를 함께 현실로 불러와서 해야되겠다. 그리고 그들을 좀 헌사하고 존경하고 위로하고 격려해줘야겠다. 이런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죠. 그래서 그들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일한다는 것과 살아간다는 것, 늙어간다는 것, 죽어간다는 의미도 반추해보자 이러한 어떤 생각들이 있었는데.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는 않았고요. 그러다보니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이 그런 아버지를 투영할만한 대상자가 가장 중요했죠. 그런 아버지가 어디있을까 그런 소가 어디있을까. 결국 5년 동안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경북 봉화에서 찾아낸건데, 그래서 워낭소리 최영균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소는요. 특별한 어떤 개인사의 대상이 아니에요. 한국에서 아버지를 두고 있고 어머니를 두고 있고 고향을 두고 있는 사람들이 딱 봉화의 할아버지 가족들을 보면 바로 남의 일 같지 않고 바로 우리 아버지 같고, 또 그 자식들을 보면 바로 나 같고. 그래서 우리들이 자식들 입장에서는 부모들한테 불효를 많이 하잖아요. 일하지 말고 용돈 줄테니까 하라는거부터 시작해서. 이런 그 효에 대한 잘못된 해석 이런 것들이 있을 수 있고 해서 이런 부분들을 할아버지와 소를 통해서, 할머니를 통해서 사실은 사람들한테 좀 불편한 감정들을 자극하고 싶었다. 이런 측면으로 하게 된거죠. 다른 이야기가 되어 버렸네요. 그리고 이제 저는 어떤 삶이나 다 의미가 있겠으나 가장 워낭소리의 메인컷이 그거입니다. 나무해 오면서, 땔감해오면서 둘이 걸어가는 장면이죠. 그런 장면인데 저는 거기서 할아버지의 어떤 소소하지만 아름답고 위대하다는거를 거기서 좀 느꼈어요. 이 할아버지가 30년 동안에 달구지에서 내려오지 않았던 분인데 소가 힘들어하니까 내려와서 같이 짐도 나눠지고 걸어가는 모습. 그래서 그 어떤 모습이 가장 할아버지를 달리 보았고 가장 아름답고 마치 성스러움 이런 것까지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래서 그 부분을 가장 좋아하고 또 하나 저는 이런 것들을 좀 피했어요. 할아버지는 원래 나무 땔감을 하실 때는 아무 나무나 하지 않아요. 오로지 하는 나무는 아카시아 나무 가시가 이렇게 있는. 왜 그 나무만 고집하시느냐. 일제강점기 때 어린 시절에 일본인들이 자꾸 한국의 나무를 베고 아카시아 나무 심는거를 보신거죠. 그 양반이 자기가 살아오면서 혼자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모르겠으나, 아카시아 나무만 해오셨다는거에요. 그래서 그 장면이 이 양반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으나 나는 그 장면을 쓰지 않았던 이유가, 너무 할아버지가 영웅화 될 수 있겠다해서 그런 부분들까지도 잘라냈어요. 곁가지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그래서 워낭소리는 합의 개념이 아니고 사실은 뺄셈, 버리는 개념 이런식으로 진행이 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아까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아마 그런 제 생각 때문에 할아버지의 좋은 장면들이 많이 버려졌어요. 좀 안타깝긴한데. 왜냐하면 그걸 잘해서 좋아진거니까 저는. 지금은 미련이 없습니다.
질문: 워낭소리를 하면서 다른 일(작품)도 했는가?(31분 42초)
그 워낭소리 할 동안은 계속 이거 하나만 했고요. 워낭소리 소를 찾을 동안은 다른 작업은 했었죠. 무당도 하고 탄광 노동자도 하고 동성애자도 다 했는데 다 말아먹었습니다. 말아먹은 이유가 작품성 이런거 보다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데로 나만을 위한 작품. 관객과 소통하지 못하고, 방송사와 소통하지 못하고, 혼자 잘난 맛으로 쎄게만 하려고 하니까 방송불가. 영화 했으면 됐겠죠. 그런 것들의 시행착오가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거 같애요. 돈 떨어지고 병 생기니까 알겠더라고요. 어쨌든간에 결과론적으로는 잘됐습니다. 잘됐는데 거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그래서 저는 사실은 지금의 결과는 아주 성취감이 있지만 10년 동안 많은 것을 잃었잖아요. 결혼도 포기해야했고, 쌀독에 쌀도 없었고. 그래서 공항장애도 생겼고 그래서, 사실은 좋다라고만 이야기는 못하겠지요. 지금 상황이 좋다고 해서 그 시간이 돌아오는건 아니기 때문에. 아무튼 그렇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시원섭섭하죠.
질문: 워낭소리 이후, 다음 작품 계획은?(33분 4초)
지금 상태는 너무 불이 달궈졌어요. 꺼지려면 아직도 멀었어요. 그래서 아마 지금 이제 끝물로 가고 있는 것 같아요. 언론사에 방송에 인터뷰 요청도 없는거 보니까 그런거 같은데. 많이 저를 표현하고 하지를 못했어요. 그동안 영화제라든가, 상을 받았다라거나. 표정관리하기도 쉽지 않았는데. 마냥 행복하지 않았고. 아까 제가 말씀드린데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고. 그러다보니 정작 다음 작품에 대한 준비를 해야하는데 하지를 못했고. 그래서 사실 이제 방향은 있죠. 나이 40넘으니까요. 그런 쪽 보다는 내면적인걸 좀 하고 싶다. 이상적인 것을 하고 싶고. 커다란 위대한 것 보다는 좀 소소한 것들의 이야기, 또 그들이 보여주는 아름다움, 위대함을 그려내고 싶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머리와 눈으로 하는 작품보다는 가슴으로 느끼는, 그래서 어떤 사람을 계몽화하고 혁명하게끔하는 이런 것들이 아니고 사람의 마음을 울림을 줘서 움직이게 하는 이런것들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고. 저는 구체적으로는 방향은 그렇고. 극영화 조연출로 들어가서 4개월 5개월쯤 뛸까하는 생각도 있고 그렇습니다. 아직도 여러 가지 할게 많은 것 같아요. 아니면 대학교를 들어가서 공부를 하든, 생각 중인데 어렵습니다 여러 가지로. 대학 때 공부를 않했거든요. 술만 마셨기 때문에. 영화 공부를 한적도 없고. 그렇습니다. 됐을까요? 감사합니다.
01. 이 강좌에 대해서
이 특강에서는 <워낭소리>로 온 국민을 울린 다큐멘터리 명장, 이충렬 감독을 만나봅니다.
수백편의 교양 프로그램과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이충렬 감독의 다큐멘터리에 대한 깊이있는 철학을 들어보실 수 있습니다. <워낭소리>가 기존의 다큐멘터리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알아보고 이를 둘러싼 논쟁과 감독의 철학에 대해 알아봅시다.
02. 강사 소개
이충렬감독
03. 강사 이력
[이충렬] - 영화감독
작품으로는 '혜화,동'(2011), '워낭소리'(2009) 등이 있음 수상 경력으로는 제7회 맥스무비 최고의 영화상 최고 작품상(2010), 제45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신인감독상(2009), 제16회 핫독스 다큐멘터리영화제 신인예술가상(2009), 제8회 달라스 아시안영화제(2009), 뉴질랜드 국제영화제(2009), 제29회 하와이 국제영화제(2009), 제6회 서울 환경영화제(2009), 제56회 시드니 국제영화제 (2009), 제7회 실버독스다큐 멘터리영화제 (2009)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