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안녕하십니까. SBS 뉴미디어국의 하현종 기자라고 합니다. 자 이번 시간에는 뉴스는 과연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여러분들과 한 번 얘기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자 뉴스라는 단어는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14세기 중세 영어에서 처음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뉴스라고 하는 영어는 NEWS 라고 돼있죠. 즉 뉴, 새로운 것들의 복수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이런 설들도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또는 뭐 약간 우스개 비슷하긴 한데요. 영어의 동서남북 즉 North South West East의 첫 글자들을 따가지고 만들어졌다, 라는 설들도 있습니다. 새로운 소식이라는 것이 사방 동서남북에서 이렇게 수집이 되기 때문이다, 라고 얘기하고 있는데 근데 사실 이거는 뭐 근거가 그렇게 크진 않습니다.
제가 왜 뉴스의 어원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하느냐면 오늘 이 시간에 뉴스라는 게 과연 원형이 무엇이었고 어떻게 진화되어 왔는지 뉴스의 어떤 프로토타입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여러분들과 얘기를 나누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자 잘 알려져 있는 얘기부터 시작을 해볼게요. 옛날에 그리스 시절 같은 경우에는 구전 네트워크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매체가 등장하기 이전이거든요. 여러분들 아주 유명한 스토리 아시죠?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투에서 그리스가 승리를 했고 이 소식을 아테네 시민들한테 전달하기 위해서 어떤 병사가 마라톤 평원 42KM를 달려가지고 시민들에게 승전보를 알린 다음에 지쳐서 숨졌다, 이런 유명한 이야기가 있죠? 왜 그랬을까요? 매체가 없었기 때문에 입에서 입으로 소식을 전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구전 네트워크가 아닌 최초의 뉴스의 원형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좀 해보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이야기인데요. 그렇지만 여러분들이 굉장히 많은 인사이트를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자 최초의 신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기원전 59년 로마 시대 로마제국 시대의 악타 디우르나 라는 그런 매체가 있었습니다. 이거는 여러분들 잘 아시는 카이사르, 케사르라고도 하죠. 카이사르가 집정관, 로마의 집정관으로 선출되고 나서 가장 먼저 취한 조치인데요. 그 조치의 내용이 뭐냐면 ‘원로원과 인민들을 위해서 회의록을 매일매일 취합해가지고 발표하라’ 라는 그런 칙령이었습니다.
즉 그 카이사르의 이 명대로 원로원에서 하루하루 단위로 의사결정이 되는 여러 가지 정책 결정사항들을 돌이나 금속판에 새겨 가지고 로마 광장에 게시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정식 명칭이 악타 디우르나 포퓰리 로마니 라고 돼있는데 이걸 해석을 해보면요. 로마인민의 1일 활동 하루하루의 활동이라는 뜻입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내용이신 것 같죠? 자 여기서 여러분들이 기억하셔야 될 것들이 돌이나 금속판에 새겼다는 점입니다. 즉 다시 말해서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게 아니라 매체가 생겨났다, 매체를 통해서 정보와 소식이 전달이 되기 시작했다, 라는 점입니다.
또 하나 이름에 1일 즉 데일리란 의미가 들어있다는 점인데요. 참고로 디우르나가 매일이라는 뜻인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저널 저널리즘 할 때 그 저널의 어원이 바로 이 디우르나입니다. 저널리즘이란 게 바로 이 단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 악타 디우르나는 왜 만들어졌을까요? 카이사르가 어떤 뭐 매체를 만들기 위해서 소식을 전달하기 위해서 이 악타 디우르나를 만들었을까요? 꼭 그렇진 않습니다. 카이사르는 정치적인 목적에서 이 악타 디우르나를 만들게 됐던 거예요. 카이사르 같은 경우에 권력을 분점하고 있는 원로원 귀족들 즉 원로원 귀족들이 권력을 거의 독점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신진 세력인 카이사르가 이 원로원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매체 즉 최초의 신문을 만들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재밌지 않습니까?
카이사르가 처음에 국유지를 인민들한테 재분배하겠다, 라는 공약으로 집정관으로 당선이 됐어요. 당연히 당시에 국유지를 많이 소유하고 있던 귀족들은 격렬하게 반대를 하게 됐는데 로마 인민들이 공개적으로 회합을 열어가지고 자 카이사르의 공약을 지켜라, 라고 얘기하고 회합을 열었는데 원로원은 자기들끼리만 모여가지고 논쟁을 하고 또 자기들끼리 얘기를 하고 자기들끼리 투표를 해가지고 세부사항들을 계속 결정을 해나가요. 어떤 특정한 정보들은 자기들이 원할 때만 제한적으로 공개를 하게 됩니다. 이러다 보니까 카이사르가 이 로마의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실제로 이 귀족들이 얘기하고 논쟁하고 투표해서 결정되는 사안들을 인민들 즉 로마 시민들한테 투명하게 공개를 함으로써 이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키겠다, 라는 아주 뚜렷한 목적이 있었던 겁니다. 즉 원로원의 권위와 어떤 권력을 깎아내리기 위한 것이었거든요.
좀 아이러니한 건데 카이사르가 악타를 만든 이유는 사실 로마 정치를 민주적으로 바꾸려는 어떤 현대적인 생각이라기보다는 원로원 귀족들을 공격해가지고 로마의 절대군주가 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게 현대적인 의미의 어떤 저널리즘과는 상당히 좀 배치되는 스토리죠. 여러분들 아마 좀 상당히 좀 재밌으실 거예요. 이 좀 우리가 또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는 부분이 이 악타에는 처음에는 굉장히 좀 딱딱하고 정책적인 내용들만 많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예컨대 뭐 재판의 결과라든가 로마 황제의 칙령이라든가 정치 토론내용이라든가 어떤 법적인 판결 등등이 많이 담겨있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담겨 있는 정보의 질이라든가 어떤 범위가 계속 넓어집니다. 나중에는 어떤 황제 칙령이라든가 재판 결과 이외에도 어디 현직 관리들의 어떤 이름이라든가 어떤 명절이나 종교 축일에 대한 이야기 또 흥미를 끌거나 굉장히 중요한 사람들의 뭐 출생 결혼 사망 이혼 또 심지어는 당시 로마 시대에 인기 있었, 인기 있었던 검투 경기의 결과 우리 요즘으로 따지면 약간 스포츠 결과 같은 것들이죠. 이런 좀 다양하고 이제 흥밋거리의 소식들까지 계속 추가가 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처음에 정보정책을 소개하기 위해서 출발한 악타가 점차 사적이고 조금 때로는 자극적인 내용으로까지 확대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게 여러분들이 익히 아시는 어떤 미디어 환경과 거의 유사하다, 라는 거를 지금쯤에는 아마 떠올리실 수 있을 거예요.
자 그 현대의 어떤 매체 환경과 유사한 점은 또 있습니다. 예컨대 이 악타라는 걸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돌이라든가 금속판에 새겼었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그 돌이나 금속판에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사람들만 접할 수가 있었어요. 근데 멀리 사는 사람들 같은 경우에는 그 악타를 볼 수가 없었겠죠. 그러다 보니까 로마의 부자들이 노예라든가 필경사 이렇게 그 필사를 하는 사람들인데 이런 필경 필경사를 동원해가지고 악타의 사본을 만들게 합니다. 그리고 이 악타의 사본을 만들게, 파피루스에 이제 사본을 만들기 때문에 이거를 도시 내에 좀 바쁘거나 약간 도시 외곽에 살아가지고 악타에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든가 아예 다른 도시에 사는 사람들한테 유료 또는 무료로 보내기 시작합니다. 자 신문이라든가 어떤 미디어와 점차 유사해지는 걸 여러분 알 수가 있죠?
또 있습니다. 자 그 로마의 도시 가옥에 이렇게 온갖 벽면들이 있는데 악타에서 전달되는 정보에 대해서 벽에 시민들이 낙서를 하기 시작합니다. 거기에 개인 의견을 달기도 하고요. 자 이런 정책은 잘못 됐다, 잘했다 내지는 뭐 이런 검투 결과에 대해서 나는 어떻게 느낀다, 라는 것들을 달기 시작합니다. 자 요즘 얘기하는 일종의 댓글, SNS라고 볼 수가 있겠죠? 이런 아까 말씀드렸던 낙서들을 통해서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과 일상을 이웃들과 공유하기 시작을 했고요. 자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들을 종합을 해보면 사실 2천 년 전 이야기이지만 인간이 다른 사람들과 정보를 공유해가는 어떤 방식은 굉장히 유사하다, 라는 거를 알고 알 수 있습니다. 그 사이에 처음에 구전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것을 넘어서서 매체가 끼어들기 시작하면서 최근 최근에 어떤 그 온오프라인 온갖 많은 미디어들이 많이 활성화돼있는 현대와 어떤 기본적인 매커니즘은 굉장히 유사하다, 라는 것을 여러분들 알 수 있을 겁니다.
앞서 말씀드린 로마의 악타는 대중매체의 어떤 프로토 타입 원형에 가깝습니다. 근데 사실 근대적인 의미의 대중매체라고 보기는 좀 어렵죠. 자 근대적인 의미의 대중매체는 언제 시작이 됐느냐, 바로 구텐베르크의 인쇄기 발명 이후에 그 기초가 다져지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들 구텐베르크 많이 들어보셨죠? 1450년쯤에 구텐베르크가 인쇄기를 발명했고요. 근데 그 전에는 그러면 어땠, 어땠었느냐. 뉴스라는 게 구전, 아까 말씀드렸던 구전 또는 필사로만 전달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로마시대에는 이제 파피루스였는데 그 이후에는 종이가 발명이 되면서 종이에 써가지고 이제 전달이 됐었, 됐었던 시절인데 사실 근데 그 종이에 써가지고 정보를 전달한다, 라는 게 그게 지금도 사실 쉽지가 않지만 그때는 더더욱 어려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책 한 권을 누군가가 필사를 해가지고 다, 또 다른 책을 한 권 복사를 하는데 엄청나게 효율이 떨어졌어요. 예컨대 구텐베르크가 성서를 그러니까 인쇄기를 발명한 이후에 성서를 3년에 걸쳐가지고 180부를 인쇄를 했습니다. 이게 뭐야 뭐 3년 동안 겨우 180부라고 얘기하실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필사본 즉 손으로 써가지고 책을 만들었던 시절의 생산속도하고 비교했을 때 이게 열다섯 배나 빠른 겁니다.
자 구텐베르크가 인쇄기를 발명한 이후에 1450년부터 1500년도까지 50년 동안 책이 한 3만종 이게 2천만 부 정도가 인쇄가 됐는데요. 이것은 그전 천 년 동안 출판된 모든 책보다 더 많은 양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인쇄기가 가져온 정보량의 혁명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어느 정도 짐작을 하실 수가 있으시겠죠. 결국 이것 때문에 성서가 일반인들한테 보급이 돼, 보급이 되면서 종교개혁으로까지 이어지게 됐다는 사실 잘 알고 계시죠? 네 필사의 시대를 넘어서 어떤 인쇄기의 시대로 왔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시절까지만 해도 어떤 뉴스 즉 매체 생산 비용이 굉장히 비싼 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뭐 누구나 인쇄기를 소유하고 책을 많이 쏟아내는 그런 상황은 쉽게 오지가 않았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근대적 의미의 뉴스 매체가 발전하기 시작하는데 그게 바로 1830년대부터입니다. 1830년대에 미국에서 어떤 구형 인쇄기가 아니라 이른바 윤전 기술이 발전을 하게 됩니다. 신문을 찍어내는 윤전기가 개발이 되고 그 기술이 발전을 하게 되는데요. 그러면서 뭐가 등장하느냐면 페니프레스란 게 등장합니다. 여러분들 1페니 즉 1페니로 살 수 있는 프레스, 한 장의 신문이란 뜻인데 이 페니프레스, 1페니가 현재 우리 돈으로 굳이 환산을 해보면 아마 한 20원 30원 정도 될 것 같아요. 엄청 싸진 거죠? 이게 중요한 것은 과거보다 훨씬 싼 가격으로 뉴스를 전달할 수 있게 됐단 겁니다. 왜냐면 제가 돈이 없고 하지만 뭐 내가 주위에 우리 사회의 소식을 알고 싶다, 라고 했을 때 한 이삼십 원 정도는 투자해가지고 신문을 사볼 수가 있게 된 거잖아요. 바로 이 점이 뉴스의 많은 것들을 바꿔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 이전에 즉 페니프레스가 등장하기 이전에 뉴스 매체가 없었느냐, 있었습니다. 근데 대부분 뭐였냐면 정당이라든가 어떤 정치 세력의 기관지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뉴스를 대량으로 생산해가지고 전파하는데 돈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후원자가 없으면 불가능했었습니다. 즉 그런 어떤 기관지를 출판하고 유통을 시켜라, 라는 자본을 누군가 대주지 않았으면 정보를 퍼트릴 수가 없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한테 어떤 경제적인 지원을 해주는 세력의 입장을 대변하는 일종의 정파적 저널리즘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페니프레스가 등장한 이후로 드디어 뉴스, 또는 뉴스 매체가 산업화 또는 상업화가 될 수 있는 단초가 마련이 되는 겁니다.
뉴스가 상업화 상품화된다는 게 꼭 나쁜 의미가 아닙니다. 뉴스가 상품화된다는 것은요, 정파성에서 탈피를 해야 된다는 의미를 같이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장에서 팔리는 상품을 한 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더 많은 구독자, 즉 소비자에게 다가가고 팔려야 되는데 만약에 그 상품, 즉 그 뉴스 신문이 특정 정파의 이해관계와 관점만 대변한다, 라고 하면 시장을 확장해나가는데 한계가 생길 수밖에 없겠죠? 그렇다보니까 무정파 즉 객관적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여기에서 바로 어느 편도 들지 않는 관찰자로서의 저널리즘 다시 말해서 의견보다는 팩트를 전달하고 또 비판을 할 경우에는 그 비판당하는 사람의 반론을 싣고 이렇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최근의 객관주의 저널리즘이 바로 페니프레스에서 태동을 하게 됩니다. 이걸 정리해보면요, 사실은 우리가 옳다 우리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객관주의 저널리즘이라는 것이 사실은 그 시작은 철저한 상업적 전략에서 비롯됐다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내레이터 : 오래 전부터 인간이 다른 사람들과 정보를 공유해가는 어떤 방식은 상당히 유사하였습니다. 처음에 구전으로 전달되어 오다가 다양한 매체 기술이 발달하면서 현대에는 많은 종류의 온∙ 오프라인 미디어들이 활성화되어 뉴스가 공유되고 있죠. 이러한 매커니즘에서 뉴스는 점차 상품화되었는데, 이는 뉴스가 정파성에서 탈피가 되어가고 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객관주의 저널리즘이라는 것이 사실은 철저한 상업적 전략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01. 이 강좌에 대해서
뉴스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상업화되어 왔는지 살펴본다.
02. 강사 소개
하현종 (SBS 기자)
03. 강사 이력
- SBS 보도본부 뉴미디어국 기자(차장) - SBS 보도본부 뉴미디어국 스브스뉴스 총괄팀장 - SBS 대통령 선거방송 <2017 국민의 선택> 총연출